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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서점 사이트의 첫 화면에서 발견한 신간 소설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화려한 표지만큼이나 흥미로운 제목이 눈길을 확 끌어 꼭 읽어봐야겠다 마음 먹고 있었는데, 드디어 완독했다. 꽤 두께가 있는 편이였는데, 유려한 문장과 흥미로운 전개방식이 무척이나 흥미로워서 생각보다 빠르게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서평

저자의 이름을 보고 혹이 한국계 미국인 작가인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였다. 그런데 그런 오해를 많이 샀는지 저자는 서문에서부터 자신은 한국계 미국인으로 오해를 많이 받지만 20년까지 한국에서 살고 현재는 홍콩에서 사는 한국인임을 거듭 강조한다. 아마도 이런 오해가 생긴데는 분명 영어로 책이 먼저 출간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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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년도 : 2024
출판사 : 위즈덤하우스
저자 : 이미리내

 

알고보니 이미리내 작가는 미국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고 하는데, 홍콩에서 살면서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 또한 영어로 소설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고. 왜냐하면 대학을 다닐 당시 교수에세 재능이 없다며 혹평을 받았기 때문.

 

하지만 그녀는 교수의 말과 달리 영어로 소설을 쓰고 유명한 국제상을 타며 밥벌이를 하게 된다. 역시 사람의 앞날은 함부로 예상하는 것이 아니다. 신기하게도 저자가 한국어 원어민이라 당연히 한국어판도 번역없이 진행될 줄 알았는데, 번역자가 따로 있었다. 왜 이렇게 진행을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조금 궁금하긴 하다. 저자가 한국인인데 도대체 왜?!

 

 

 

세 개의 국적과 여덟 개의 얼굴

이 책의 주인공은 47살에 남편이 젋은 여자와 바람이 나면서 이혼하게 된 중년여성이다. 그녀는 황혼 요양원에서 일하고 있는데, 갑작스러운 인생의 혼란에 힘들어하던 그녀는 삶의 변화를 위해 노인들의 인생을 글로 쓰는 '부고 쓰기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그러던 어느 날 흙을 먹는 치매 노인으로 유명한 '묵 할머니'가 다가와 자신의 부고를 써달라 부탁한다.

 

 

여덟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며 묵 할머니는 하나 둘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도저히 믿기 힘든 만큼 다양한 국적과 정체성으로 탈바꿈해나가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주인공은 푹 빠져들고 만다. 노예, 탈출 전문가, 살인자, 테러리스트, 스파이, 연인, 어머니...

 

그녀는 일제 강점기 평양 근처의 농촌 마을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폭력 속에서 어머니와 단 둘이 버티며 살았다. 그러나 영어를 배운다는 것에 화가난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려 눈을 먹게 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 때 그녀의 삶은 완전히 바뀌어버리고 만다. 이후 어머니의 눈을 고쳐주겠다는 말에 속아 인도네시아 스마랑의 위안소로 끌려간다.

 

잔인한 위안소 생활을 끈끈한 친구들과 함께 버텨내던 어느 날 미군의 개입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그러나 곧 한국전쟁이 터지고 그녀는 남장을 한 채로 부산에 위치한 미군 부대 근처 멍키하우스에서 일하게 된다. 그곳 또한 전쟁의 끔찍한 상흔이 가득한 곳이었고, 그녀는 또 다시 탈출하여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 곳에서 다정한 남편을 만나 어머니가 되어 행복한 날들을 보내던 어느 날,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녀가 유창하게 외국말을 하는 것을 수상쩍게 여긴 이웃의 신고에 의해 그녀는 북한 정부에게 잡혀간다. 그리고 그녀는 유용히 본 그들은 가혹한 훈련을 통해 공작원으로 만들어 남한에 파견을 보내고, 그녀는 자신의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몰입감 넘치는 스토리와 독특한 구성

프롤로그는 딱히 몰입되지 않아 과연 이 책이 나랑 잘 맞을까 우려가 되었는데, 묵 할머니의 다섯 번째 인생이 시작되자마자 급 몰입되었다. 문체도 심플하면서도 굉장히 묘사가 맛깔져서 글을 읽는 재미가 있었다. 무엇보다 흥미진진한 여러 인생들이 연달아 영화처럼 펼쳐져서 얼른 다음 스토리가 읽고 싶어 책장을 빠르게 넘기게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시작부터 다섯 번째 인생부터 진행된다는 점. 그 다음에도 뒤죽박죽 이야기가 진행되어서 자칫 헷갈릴 수가 있다. 실제로 읽으면서 엥?하는 순간이 몇 번 있긴 했는데, 챕터의 중반부에 바로 해결을 해줘서 크게 답답하진 않았다. 그래도 이 부분에서는 호불호가 크게 갈릴 것 같긴한데 개인적으로는 더욱 주요 인물의 스토리가 다이내믹하게 느껴져서 나쁘진 않았다.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면 자칫 중간에 지루하다 느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데, 한편으로는 또 괜찮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확실히 순서가 뒤엉켜 있다보니 더욱 묵 할머니의 인생이 드라마틱하고 영화같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뭔가 자꾸 영상이 떠오르는 듯한 생생함이랄까. 심지어 초반에 예상을 했음에도 반전이 거듭 이어져서 읽는 재미가 배가 되었다.

 

다만 마지막 부분은 다른 챕터에 비해 살짝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들어서 조금 아쉬웠긴 했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굉장히 좋은 구성에 잘 만든 스토리가 아닌가 싶다. 요새 소제목없이 길게 이어지는 소설들이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명확히 챕터와 주제가 드러나는 소설이 읽기에도 좋고 더 몰입하기 좋은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이번 소설의 소제목들은 참 잘 지은 것 같다.

 

 

 

영상화가 시급한 매력적인 작품

최근에 노벨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작품들도 그렇고 전쟁으로 인한 분단과 이념의 갈등 등은 우리나라 문학만의 가질 수 있는 좋은 소재들이 아닌가 싶다. 물론 소재라고 평하기에는 굉장히 무겁고 깊은 아픔이 서려있는 역사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욱 다양한 각도와 시선으로 이러한 무거움을 희석해서 변주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닐가 싶다. 리얼함도 포함하여.

 

 

이 소설을 읽으면 해외에서는 굉장히 논픽션으로 느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오랜 역사적 사실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너무 리얼하게 느껴지는데, 일부 챕터에서는 그 잔혹함과 아픔이 너무 생생하게 느껴져서 읽기가 참 힘들었다. 분명 저자의 필력도 있겠지만 왜 이렇게 생생한고 하니, 저자의 가족과 관련된 진짜 사연이 담겨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최근에 한국계 미국인 작가들이 우리나라의 역사적 스토리를 소재로 삼은 소설들을 우연찮게 많이 보게 되었는데, 충분히 고증을 했을테지만 미묘한 부분에서 뭔가 살짝 이질적인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은 역시 한국인 작가가 써서 그런지 마치 진짜 역사 속 이야기를 보는 듯 해서 더욱 몰입감이 좋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책을 읽으면서 충분히 영상화로 만들어질 만하고 많은 감독들이 탐낼만한 작품이라고 여겨지는데, 과연 영상화가 될 지 궁금하다. 워낙 원작이 탄탄하기도 하고 비현실적인 세계를 무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이왕이면 <파친코>처럼 조금은 멀리서 객관적인 시선으로 은유적인 연출을 곁들여서 아주 멋지게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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