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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반지수 작가의 세 번째 책을 읽어본다. 꽤 오래 읽었던 자전 에세이 <다시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어>와 달리 이 책은 저자가 산책을 하면서 바라본 풍경과 생각들을 담고 있어서 굉장히 가볍게 읽기 좋았다. 그림 에세이라는 형식답게 그림도 많아서 정말 산책하듯 힐링하는 독서였달까.
보통의 것이 좋아 책리뷰
보통 그림에세이라고 하면 빈 공간이 많고 다소 내용이 빈약한 책을 떠올리기 쉽다. 이 책 또한 그럴 것이라 생각했는데, 글의 양이 적다고 글이 가진 힘이 작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색과 탐색을 좋아하는 작가의 성향 덕분인지 글귀 곳곳에 깊은 생각과 통찰이 적절하게 잘 담겨있어서 의외로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기도 해서 나름 유익한 면모도 있었다.

출판년도 : 2021
출판사 : 위즈덤하우스
저자 : 반지수
그러고 보면 전작을 읽을 때도 느꼈지만, 반지수 작가는 참 책을 깊게 많이 읽는 것 같다. 좋은 책을 잘 골라 재밌게 읽는 것이 책 속에서도 느껴진달까. 책이라는 물성을 좋아함에도 불구 책을 쉽게 잘 읽지 못 하는 편이라 그 부분은 조금 부럽기도 했다. 다양한 책을 재밌게 읽는 것. 그것도 나름 재능이라면 재능 아닐까.
덕분에 스스로라면 절대 알지도 읽지도 못 했을 책 3권을 얻어갔다. 지금도 이전 책에서 추천한 책들을 읽고 있는데 언제 다 읽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기록해 두기. 예술을 향한 단순한 즐거움과 열정적인 애정을 담은 <우연한 걸작>, 데버라 리비의 3부작 에세이 <알고 싶지 않은 것들>, 나쓰메 소세키 <인생 이야기>.
나만의 보폭으로 새로운 길을 걸으면 보이는 풍경
서울 명소들 말고 샛길로 살짝 빠져서 걷다보면 의외로 정말 오래되고 옛스런 골목들이 정말 많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사실 서울에 살지 않기 때문에 항상 목적지만 찍듯이 다녀오면 그런 부분을 놓치게 되는데, 가끔씩 저자처럼 여유를 갖고 둘러보면 전혀 다른 풍경에 색다른 여행을 해볼 수 있다.
물론 저자는 서울에 잠시 살았기 때문에 더욱 그 풍경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 풍경이 책 속에 고스란히 글과 그림으로 담겨져 있어서, 마치 내가 직접 산책하면서 본 풍경인 듯한 익숙함 그리움과 따뜻함이 물씬 느껴진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잠시 살고 애정을 깊게 가졌던 후암동이라는 동네를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네를 깊이 안다는 것은 어쩌면 이름을 기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 외지인으로서 서울의 지명을 지하철역 정도로 기억하는 나에게 새로운 동의 이름들이 등장하는 건 자못 새로운 느낌이다. 원래도 길을 헤매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편인데, 앞으로는 좀 더 가보지 않은 숨겨진 골목들과 마을을 하나씩 여행하듯 탐색해보고 싶어졌다.
반지수 작가의 그림을 소장하고 싶다면
반지수 작가는 비록 남들보다 늦게 그림을 시작했지만, 재능과 운으로 생각보다 빠르게 작가로서 자리를 잡은 것 같다. 어찌보면 스스로 말했듯 필연처럼 흘러가는 전개였달까. 그런 자연스럽게 꿈을 이룬 과정이 조금 부러운데, 그녀의 자전적 스토리를 읽어보면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어서 한편으로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글을 읽어보면 그 사람의 성격과 인품이 은은하게 드러나기 마련인데, 저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따뜻하다 못해 아련하고 아름다움이 흘러 넘치는 것 같다. 분명 우리가 흔히 보는 일상을 소재로 그려진 그림인데 왜 이렇게 바라보면 애틋하고 다양한 감정들이 들까 싶은데, 그건 바로 저자의 생각과 시각이 마치 프레임처럼 한 단계 씌워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길지 않은 소박한 생각을 담은 에세이 글도 좋지만 무엇보다 표지만큼이나 예쁜 그림들이 정말 많이 실려있어서 눈이 즐겁다. 바라만봐도 기분이 좋아진달까. 판형 또한 정사각형 프레임으로 널찍해서 그림을 보기 참 좋다. 다만 책이 조금 크기 때문에 갖고 다니면서 읽는 건 무리. 혹시 반지수 작가의 그림을 좋아한다면 이 책을 소장용으로 간직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인상깊은 책 속 구절
나뭇잎의 그림자 사이로 빛나는 빛을 그릴 때마다 이 모습을 표현하는 단어가 없을까 궁금했는데 검색해 보니 있었다. 우리나라 말로 '볕뉘'라고 한다. 뜻풀이는 1. 작은 틈을 통하여 잠시 비치는 햇볕, 2.그늘진 곳에 미치는 조그마한 햇볕의 기운, 3.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보살핌이나 보호. - p.43
좁아도 불평하지 않고 '그냥' 피어나는 것. 살고자 하는 열망이나 의지보다는 딱히 재고 따지지 않아도 이곳에 살기로 한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음이 느껴진다. 이 풀들은 스스로가 강할 것도 약할 것도 없는데, 힘들다거나 즐겁다거나 하지도 않을 텐데, 경이로움이나 안쓰러움을 느끼는 건 단지 내가 인간의 눈을 가져서인지도 모르겠다. - p.72
인생은 해가 바뀌어도 사실은 어제와 같은 많은 날들이 이어지는 것이고, 동시에 새로운 변화 역시 자신의 마음에 따라 언제 어느 순간이든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 해를 받아들이기 더 가볍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 - p.110
추억이나 흐릿한 기억들은 이렇듯 온갖 사물에 사로잡혀 있다. 처음이라서 잊을 수 없는 것들이 잔뜩 있었던 그 시절이 그립다. 모두가 나를 사랑해주었던 시간이어서, 세상 자체에 대한 첫사랑을 품은 시기여서 그만큼 그때의 모습들이 내 안에 오래 남아 있는 것은 아닌지. 세상이 너무 어색하고 미숙하지만 있는 그대로 사랑받았던 시기이기에 아름다웠던 게 아닐지. 기억 속 오후 네 시의 빛에 그 시기가 묻어 있다. - p.115~116
데이비드 호크니는 이런 말을 했다. "스케치북을 한 시간 반 만에 다 채웠다. 나는 그 후에 울타리를 보다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림으로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 풀을 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을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그 느낌을 이제 잘 알고 있다. 그림으로 기억을 남기는 일은 사진보다도 강력하다. 이 그림들을 그림으로써 나는 미래에 잃어버린 추억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이 순간을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럴 만큼의 힘이 있는 그림을 앞으로도 계속 그리고 싶다. - p.167~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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