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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한 권을 남겨두고 타카노 후미코의 만화를 거의 다 읽어간다. 뭔가 목표를 이룬 듯한 뿌듯함과 동시에 아쉬움이 드는 건 왜일까. 이번에 읽은 만화 작품집 <막대가 하나>는 6편의 아기자기한 단편들이 모여 있어서 더욱 다채로운 느낌이다. 독특한 이야기와 장르를 넘나들는 그녀만의 개성적인 연출을 즐기기 참 좋달까. 여전히 난해하긴 하지만.

 

 

 

막대가 하나 책 리뷰

작가가 연배가 있어서 당연하겠지만 여기 실린 만화들은 1987년부터 1994년까지 발표된 것들을 모은 작품집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 작품들 속 이야기의 배경이 다소 옛날스러운 느낌이 들긴 하는데, 캐릭터의 설정이라던지 스토리 전개나 연출은 전혀 올드해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세련되고 독특한 느낌이 물씬 난다고 할까.

 

막대가-하나-책-표지

출판년도 : 2016
출판사 : 북스토리
저자 : 타카노 후미코

 

무려 30년도 전에 이런 스타일을 내보였다고 하니, 시대를 앞서가도 한참 앞서간 듯 한다. 참 이렇게 당시 시대 스타일과 다르게 독보적인 감각을 내보이는 작가들을 보면 참으로 대단하다 느끼는데, 아쉽게도 이런 스타일의 작가는 작품수가 적은 게 흠이라면 흠이다. 오래도록 활동을 했다면 작품이 얼마나 깊어가 넓어질지 괜시리 궁금해진다. 이미 나온 작품으로도 충분히 훌륭하지만.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6편의 단편 이야기

 

 

어린 시절을 보낸 니카타를 서정적인 필치로 그려낸 <아름다운 마을>은 1960년대 일본 고도 성장기에 공장을 다니며 노조 운동을 하는 신혼 부부의 이야기가 그려지고, <병에 걸린 토코모>는 입원한 소녀의 눈으로 주변 풍경을 아름답게 그리며, 이어서 <버스로 네 시에>는 약혼자의 집을 찾아가는 여성의 복잡 미묘한 심경 변화를 절묘하게 그려낸다.

 

더불어 <내가 아는 그 아이>는 행복의 의미에 대해 묻는 우화 같은 작품이고, <도쿄 코로보클>은 대도시 도쿄에 숨어살며서 인간과 공생하는 작은 생명체들의 귀농하게 된 과정을 그려냈으며, 마지막 <오쿠무라씨의 가지>는 가전제품을 경영하는 중년의 남성 오쿠무라 씨가 우주에서 온 미지의 생물에 의해 25년 전 먹은 점심을 상기해보는 내용이다.

 

 

 

현실적인 소인의 일상을 다룬 흥미로운 단편

새로운 단편을 보기 위해 책장을 넘길 때마다 예상치 못한 스토리와 전개로 놀라움과 의아함을 동시에 갖게 된다. 가장 인상깊었던 작품은 <도쿄 코로보클>. 정말 좋아하는 지브리 작품 중 하나인 <마루 밑 아리에티>를 연상케 하는데, 굉장히 현실적인 버전이라고 보면 된다.

 

 

여기서 등장하는 소인이라는 설정의 기원은 영국의 설화인 듯 한데, 참 유럽에는 이런 아기자기한 설화가 많은 것 같다. 그래서 판타지가 발달했나 싶기도 하고. 물론 우리나라를 포함해 동양에도 설화는 많지만 확실히 결이 다른 느낌. 하지만 두 작품을 보고 나면 굉장히 일본스러운 아기자기함이 더해진 느낌이라 늘 흥미로운 설정이다.

 

솔직히 타카노 후미코 작가의 만화들은 만화가나 지망생들에게는 배울점이 많은 연출력을 갖고 있지만, 단순히 만화적인 콘텐츠 측면에서 보면 그다지 재미가 없긴 하다. 간혹 흥미로운 부분이 있긴 하지만 만화로서의 몰입도는 상당히 낮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쿄 코로보클>은 한 권으로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취향저격이었다.

 

 

 

난해하고 다소 지루했던 내러티브

그 다음으로 기억에 남는 작품은 <오쿠무라씨의 가지>인데, 갑자기 여자 종업원 모습을 하고 등장한 외계 생명체가 자신의 선배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주인공 오쿠무라에게 25년 전 먹은 점심의 내용을 집요하게 캐묻는 내용이다.

 

 

그 말을 듣고 황당해 하던 주인공처럼 당장 어제 일도 기억 안 나는데 어떻게 25년 일을 기억하겠냐 싶지만 끊임없는 질문에 결국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기억을 거슬러 가는 과정을 묘사하는 연출이 단연코 이번 책에서 가장 압도적이지 않았나 싶다.

 

와 어떻게 여기까지 연상이 되지 싶었던. 작가가 평소 즐기는 작품들이나 머릿 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데 내용 측면에서는 너무 난해하고 모호해서 재미는 없었다. 그냥 다 읽기 위해 억지로 끝까지 읽었달까. 특이하긴 했는데 딱히 재밌진 않아서 아쉬웠던 단편.

 

 

 

독보적인 스타일을 음미하기 좋은 책

역시 아직까지 가장 재밌었던 책은 <빨래가 마르지 않아도 괜찮아>인 것 같다. 물론 그 작품도 작가 특유의 개성이 가득 묻어나긴 했지만 그래도 가장 대중적이였던 듯.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작품 중에서도 제일 인기가 많다고 한다. 독특하고 매력적인 작품에 심취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취향은 대중성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는 모양이다.

 

 

국내에 번역된 그녀의 작품 중 남은 책은 이제 <럭키 아가씨의 새로운 일>이라는 한 권 분량의 중편과 인터뷰 형식의 <나를 해체하는 방법> 뿐이다. 원래는 만화만 읽으려고 했는데, 거의 다 읽고 나니 그녀의 세계가 궁금해서 인터뷰 책도 읽고 싶어졌다. 일본에서도 구할 수 없다고 하니 더욱 탐나지 않은가.

 

솔직히 만화를 좋아하는 이라고 무조건 이 책을 권하긴 어려울 것 같다. 흔히 생각하는 만화적 재미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오히려 만화를 정말 다양하게 보고 깊이 있게 보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아니면 연출적인 요소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읽으면 정말 좋은 교본같은 만화가 아닐까 싶다. 역시 만화가들의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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