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로 그녀의 작품들은 연일 화제 속에 올랐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아시아 여성 최초로 수상했다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운데, 더 기쁜 점은 수상작을 번역없이 오롯이 원어 읽어볼 수 있다는 거. 이런 좋은 기회에 도저히 안 읽어볼 수가 없어서 얼른 책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읽게 된 첫 책은 바로 <채식주의자>.
채식주의자 책리뷰
한강은 시적인 문체를 사용해서 아름답지만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는데, 그의 작품 <채식주의자> 또한 반응이 극과 극을 달릴만큼 심오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보통 입문작으로는 <소년이 온다>를 먼저 추천한다고. 나 또한 문학 초보생이라 <소년이 온다>를 먼저 읽기 시작했는데, 마치 운명처럼 <채식주의자>가 손에 들어와버렸고, 먼저 다 읽어버렸다.
출판년도 : 2007, 2022(개정판)
출판사 : 창비
저자 : 한강
사실 노벨문학상 수상 이전부터 한강 작가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이미 <채식주의자>로 한국인 최초로 맨부커상 수상 소식을 들었기 때문. 그래도 뭔가 아직 내 내공으로는 읽기가 어려울 듯 하여 미뤄두고 있었는데, 이렇게 한순간에 품절대란이 일어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읽어두는건데...
한강 작가의 아버지 또한 소설가로 한승원 작가이다. 그리고 형제들도 소설가와 만화가로 활동하고 있는데, 그야말로 대단한 집안이 아닌가 싶다. 한강 작가의 재능은 일찍이 두각을 나타냈다고 하는데, 같은 소설가인 아버지의 인터뷰에 따르면 딸이 쓴 문장에 질투심이 날 때도 있었다고 하니,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엄청나게 놀라운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악몽을 꾼 뒤 육식을 거부하는 아내 (줄거리 스포O)
1장. 평범하게 살던 주부 영혜는 어느 날 끔찍한 악몽을 꾼 뒤로 모든 육식을 거부한다. 순종적이던 아내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한 남편은 그녀의 친정식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가족들은 어떻게든 그녀에게 고기를 먹이기 위해 설득, 회유, 폭력 등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지만, 결국 역효과만 크게 나서 영혜는 자결을 시도한다.
2장. 그러한 영혜를 업고 병원에 데려다주었던 형부는 어느 날 아내를 통해 처제에게 몽고반점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어린 아이에게만 있을 법한 반점이 있다는 것에 확 매료되어버린 형부는 그 날부터 영혜에게 집착하기 시작하고, 그녀에게 자신의 영상의 주인공이 되어줄 것을 부탁한다. 대신 옷을 벗고 몸에 꽃이 그려진 채로.
3장. 끔찍한 상황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뒤 영혜는 언니에 의해 정신병원에 갇히게 된다. 파괴된 가정을 지키는 것도 벅찬데 영혜마저 상태는 더욱 악화되고, 그 과정에서 언니 또한 자신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차차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던 영혜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는데...
잘 읽히는 문체 그러나 몰입하면 괴로운 내용
굉장히 어려워서 읽기 힘들 것 같다는 예상과 달리 책은 초반부터 굉장히 잘 읽히는 문체로 술술 읽혔다. 남편의 입장에서 서술된 영혜의 기이한 행동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기분이었달까. 하지만 2장으로 넘어가면서 부터는 솔직히 쉽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기괴하거나 잔인, 외설 등 자극적인 내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지 읽기가 참 버겁긴 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비교적 술술 감정적인 서사에 따라 잘 읽히긴 했는데, 자꾸만 나무가 되기 위해 스스로 고통을 자초하는 영혜의 모습이 글만으로도 너무 잔인하게 느껴져서 소름이 쫙쫙 끼쳤다. 읽으면서 조금 정신적으로 약하거나 심약한 분들이 읽으면 한동안 짙은 트라우마가 생길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만큼 날것의 생생함이 가득한 작품이었다.
소설은 총 3장으로 마치 3편의 다른 이야기를 합쳐놓은 듯 하다. 하지만 영혜라는 인물을 통해 하나로 이어지고 결국 하나의 책이 되었다. 이야기는 남편, 형부, 친언니의 시점으로 영혜를 투영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영혜의 진짜 속마음과 생각은 들어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저 남들의 시각과 말만이 영혜를 이리저리 휘저어놓는다.
폭력이 새긴 상처가 드러나는 방식
솔직히 초반부터 남편이나 가족들의 행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육식을 하지 않는다고 강압적으로 고기를 입에 넣으려하다니. 상당히 폭력적인 처사가 아닌가.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 역시나 정산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보통 좋은 가족이라면 오히려 왜?가 아닌 그래라고 하면서 채식 위주의 식단을 꾸려줄 테니까.
하지만 결국 그녀가 나무가 되겠다며 더욱 극단적으로 행보를 보이자 가족들은 외면해버리고, 오롯이 연민을 지닌 언니만이 그녀를 챙긴다. 물론 처음에는 그녀 또한 영혜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른 방식의 폭력으로 그녀를 내몰고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 즈음에는 드디어 영혜를 이해하고, 그녀 또한 영혜처럼 이미 망가져버렸음을 인지하게 된다.
채식주의자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모두 영혜를 외면하거나 폭력적으로 아니면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녀를 다룬다. 영혜과 왜 갑자기 악몽을 꾸기 시작하고 육식을 하게되었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추측해볼 수 있는 옛 기억이 잠시 나오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폭력성으로 기인한 것이었다.
자신을 물은 개를 죽여버려 잔치를 열어버린 아버지. 그리고 그 외에도 가부장적인 폭력을 수시로 드러냈던 아버지로 인해 영혜의 마음 속에는 작은 멍이 들어있었다. 그것은 바로 죄책감이였고 그 죄책감은 서서히 커져 악몽으로 드러나고, 육식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내 아무도 상처주지 않는 생명력 깊은 나무가 되기로 마음 먹는다.
개인적으로 3장의 이야기가 뭔가 굉장히 와 닿는 부분이 많았다. 영혜처럼 그저 남편에게 평가되고 간택되어 힘겹게 결혼생활을 이어간던 주변 인물 인혜가 화자가 되어 나온 것. 결국 나중에 그녀는 자신 또한 영혜처럼 미쳐버리지 못 했을 뿐 같은 상처를 지니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그녀를 깊숙한 내면으로 당겨버린다.
마지막 허윤진 해설 완독 추천
사실 책을 다 읽고나서도 완벽히 이 작품을 이해하긴 어려웠다. 그나마 마지막 해설을 읽고서야 무너가 커다란 맥락과 깊이를 조금 느낄 수 있었던 듯. 개인적으로 해설이 길거나 난해하면 읽기가 무척 싫은데 이 책 또한 처음에 잘 안 읽혀서 넘겨버릴려고 했다. 그런데 후기들을 보니 꼭 해설을 보라는 이야기가 많지 않던가.
겨우 힘겹게 마음을 다잡고 끝까지 읽었는데, 읽고나니 확실히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단순히 어려운 것이 아니라 조금 색다른 느낌의 평론을 읽은 듯한 느낌. 지금은 활동하지 않는 허윤진 문학평론가의 해설이었는데, 꼭 마지막까지 읽는 것을 강추한다.
호불호가 크게 가릴 작품
<채식주의자>는 저명한 문학상을 수상하긴 했지만 모든 사람에게 추천하긴 어려울 듯 하다. 그만큼 난해하기도 하고 대중적으로 호불호가 크게 갈릴만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상한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이를 말리고 싶진 않지만, 조금 큰 각오를 하고 읽는 게 좋을 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아직 완독을 하진 않았지만 이 작품보다는 <소년이 온다>가 더 취저였고 마음에 와 닿는 책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기 잘 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여러 해석의 여지를 가진 책이라는 점. 처음 읽고나서는 특히 2번째 장은 자칫 외설로 느껴질까봐 걱정스러웠는데, 여러 해설을 읽고 보니 내가 아직은 이해하지 못하는 숨겨진 메세지가 더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문학에서 소재나 단어나 문장들은 그냥 쓰이는 법이 없을테니까. 찾아보니 이 책은 이미 2010년에 영화로 만들어진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얼마나 흥행에 참패를 했던건지 현재 볼 수 있는 곳도 없고 평점은 아주 처참하다. 그래도 이번 수상으로 인해 다시 재개봉하는 모양인데, 생각보다 책의 분위기를 잘 표현했을지는 의문이다.
그래도 생각보다 꽤 유명한 배우들이 캐스팅되어 있었는데, 아쉽게도 영혜 역할의 배우는 이미지적으로 좀 많이 안 어울리긴 했다. 형부도 그렇고. 차라리 제대로 다시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책으로도 어려운 작품이라 영상화하기는 더욱 쉽지 않을 것 같다.
▼ 관련 포스팅
김금희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 과거의 사건과 트라우마로 연결된 숨겨진 인연
이미리내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한국인 작가가 영어로 쓴 격동적인 역사 속 여성 이야기
작은 땅의 야수들 - 한국계 미국인 작가가 쓴 가장 한국적인 역사 소설
백수린 장편소설 <눈부신 안부> 다정한 마음으로 전하는 애틋한 사랑
HBO 미드 <빅 리틀 라이즈> 폭력 앞에 서로를 지켜나가는 여성들 이야기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강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 한 소년을 따라가는 5·18 광주의 아픈 기억 (4) | 2024.12.02 |
---|---|
<달러구트 꿈 백화점 2> 잠들면 나타나는 비밀 상점의 두 번째 이야기 (0) | 2024.11.20 |
타카노 후미코 만화 <막대가 하나> 독특한 시각과 기묘한 스토리 6편을 담은 작품집 (14) | 2024.11.17 |
유영광 장편소설 <비가 오면 열리는 상점> 불행을 팔아 행복을 살 수 있는 특별한 가게 (0) | 2024.11.16 |
다니구치 지로 <우연한 산보> 평범한 일상 속 담긴 실제 도쿄 거리의 감성 (8) | 2024.1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