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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 추천으로 백수린 작가의 첫 장편소설 <눈부신 안부>를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도 여러 번 국내 소설을 추천받긴 했지만 유명한 작품임에도 잘 안 읽히고 취향에 안 맞아서, 혹여나 이 작품도 그러면 어쩌나 살짝 우려가 되었어요.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술술 잘 읽혀서 좋았습니다. 덕분에 괜찮은 책 한 권을 알게 되었네요.

 

 

 

 

눈부신 안부 책소개

책을 처음 받아들고 보니 굉장히 예쁘고 산뜻한 표지가 눈에 띄었는데요. 파란색의 상쾌한 하늘과 어딘가 힘차게 걸어가는 듯한 고개 돌린 여성의 모습에서 이 책의 내용이 어떨지 궁금케 합니다. 소설을 읽기로 결심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국내 소설가를 잘 모르는데요. 백수린 작가도 이번 작품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네요.

 

눈부신-안부-책표지

출판년도 : 2023
출판사 : 문학동네
저자 : 백수린

 

백수린 작가는 2011년 데뷔 이래 단편과 중편 소설을 꾸준히 써 오고 있다고 하는데요. 발표하는 작품마다 흔들림 없는 기량을 보여주어 많은 애독자와 더불어 평단에 좋은 평을 받고 있는 기대주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드디어 등단 12년 만에 첫 장편 소설로 <눈부신 안부>가 나온 것이라고 하네요.

 

소설은 전체적으로 애틋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지만 배경에 '파독간호사'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얹혀서 더욱 다채로운 깊이를 선사합니다. 저자는 주변에서 장편소설로 많은 이야기를 추천받았음에도 쉽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어느 날 여름 우연히 '파독간호사'에 대한 일화를 듣고 드디어 첫 장편소설을 쓸 마음을 먹게 되었다고 합니다.

 

 

 

색다른 시선으로 그린 파독 간호사의 이야기

이야기는 성인이 된 주인공 해미가 우연히 대학 동창이자 과거 썸남인 우재를 만나 과거를 회상하면서 시작됩니다. 그녀는 어릴 적 뜻밖의 사고로 친언니를 잃게 되고 가족은 슬픔에 잠기게 됩니다. 결국 아버지만 홀로 한국에 남게 되고, 해미는 엄마와 여동생 해나와 함께 믄 이모가 있는 독일 G시로 가서 잠시 살게 됩니다.

 

 

낯선 언어와 아무도 모르는 도시에 힘겹게 적응하던 중 해미는 이모의 소개로 파독간호사 출신의 다른 이모들과 그녀들의 자녀인 레나와 한수를 만나고 친해지게 됩니다. 점차 평온한 일상을 맞이하던 어느 날 한수의 엄마인 선자 이모가 갑자기 뇌종양에 걸리게 되고, 한수는 친구들에게 엄마의 첫사랑을 찾아 기운을 복돋아 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렇게 셋은 선자 이모의 일기장을 토대로 첫사랑을 추리해나가고 마침내 KH라는 이니셜이 '기호'라는 이름인 것 까지 알아내게 되는데, 그러나 이후 IMF가 터지는 바람에 해미네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고 맙니다. 한국에서도 해미는 꾸준히 단서를 쫓지만 유년 시절의 한계에 번번히 부딪치고 점점 친구들과 거리를 두게 됩니다.

 

이후 우재를 통해 다시 독일 시절을 떠올리게 된 그녀는 다시 한 번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찾아나서게 되는데요. 그 과정에서 당시에는 알 수 없었던 단서들이 새롭게 떠오르고, 새롭게 알게 된 진실 속에서 감춰두었던 과거의 상처를 꺼내 치유하고 앞으로 나아갈 희망을 찾아나가게 됩니다.

 

 

 

아름다운 문장과 몽글몽글해지는 감성

'파독간호사'라는 용어는 영화 <국제시장>이나 여러 다큐들을 통해 아주 짤막하게 역사적 배경으로 기억될 뿐이였는데요. 이 소설을 통해 단순히 희생, 헌신으로 안타까운 흑백 장면으로 남았던 그 시절의 그녀들의 모습이 굉장히 생동감 넘치는 색색의 컬러로 느껴지는 듯 했습니다.

 

 

보통 역사적인 이야기가 배경에 담길 때 무거워지곤 하는데 이 책은 그런 면에서 너무 무겁지도 않고 담담하게 마치 평온한 일상을 보내듯 흘러가서 좋더라구요. 백수린 작가의 작품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문체가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듯 잘 읽혀서 놀라웠습니다.

 

평소 소설을 잘 읽지 못하는 편이라 아무리 재미있어도 끝까지 읽는 것이 항상 버거웠었는데요. <눈부신 안부>의 경우 생각보다 너무 잘 읽혀서 완전 취향저격 당한 느낌이더라구요. 재밌게 읽히는 소설도 있구나 하고 무척 신기했습니다. 심지어 바빠서 아주 짧게 끊어서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흩어지지 않고 읽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몰입되더라구요.

 

  마치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눈앞에서 연기처럼 희미해지는 걸 볼 때 처럼, 겨울 강아래 얼어붙어 있는 파문을 볼 때처럼 아득해지는 그 감정의 이름을 나는 여전히 모른다.

  숨기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게 사랑일 테니까. 봄볕이 나뭇가지에 하는 일이 그러하듯 거부하려 해도 저절로 꽃망울을 터뜨리게 하는 것이 사랑일 테니까. 무엇이든 움켜쥐고 흔드는 바람처럼 우리의 존재를 송두리째 떨게 하는 것이 사랑일 테니까.


  설익은 열정과 어디로 흘러가면 좋을지 모를 욕망들이 이른 봄의 꽃망울처럼 앞다투어 피어나던 시절을 우리가 통과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건 아무래도 백수린 작가의 흡입력 있는 문장력도 한 몫한 듯 합니다. 보통 너무 은유적인 묘사는 내용이 눈에 안 들어올 때가 종종 있는데요. 백수린 작가의 글귀는 굉장히 자연스러우면서도 아름답고 유려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마치 장면이 글을 읽는 눈 앞에 그려지는 듯하달까요. 덕분에 아름다운 문장을 실컷 음미하며 독서를 할 수 있었습니다.

 

 

 

아쉬운 반전과 여웃 짙은 엔딩 (스포O)

줄거리는 마치 드라마의 응답하라 시리즈에 남편 찾기처럼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찾는 것에 중점을 둡니다. 책을 읽는 내내 과연 첫사랑이 누구이고, 어떤 사연일까를 쫓으면서 엄청 몰입하게 되더라구요. 결국 정말 끝에 가서야 진실을 알게되는데요. 솔직히 말하면 반전 요소는 생각보다 허무했고, 조금 아쉬운 부분이였어요.

 

 

스포가 될 것 같아 정확하게 말할 순 없지만, 개인적으로 그렇게 놀라운 반전처럼 느껴지진 않더라구요. 몇 해 전이라면 꽤 놀라울 반전이였겠지만 요즘에 트렌드가 방영된 듯 해서 살짝 실망스러웠달까요. 오히려 굳이 반전 요소를 넣을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장력과 몽글몽글한 감성을 끝까지 이어갔어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컸어요.

 

영화는 보면서 전체적인 느낌은 오히려 <국제시장>보다는 영화 <윤희에게>가 떠올랐는데요. 인적이 드문 해외의 도시가 등장하는 것이나 엄마와 딸이 함께 첫사랑을 회상하거나 찾는다는 것에서 뭔가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느껴졌어요. 그래서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면 굉장히 예쁘게 연출되지 않을까 기대가 되더라구요.

 

파독간호사 이모와 G시의 이야기도 무척이나 애틋하고 아름답지만 개인적으로는 우재와의 은은한 로맨스 이야기도 굉장히 와 닿았습니다. 사실 해미가 너무 트라우마에 갇혀 답답한 모습을 내보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해미에게 다가서는 우재의 모습에서 아주 찐사랑의 면모가 느껴지더라구요.

 

  "넌 진짜 늘 혼자 있었는데. 막상 말 시키며 할말 다 하니까 그렇게 수줍음이 많거나 한 것도 아니면서, 말을 먼저 거는 법도 없고. 결정적인 순간에 사람들에게 묘하게 벽을 치고. 선배들은 다 널 좀 어려워했지만, 이상하게 난 처음부터 네가 어렵진 않더라. 어쩌다 한 번씩 네가 속 이야기를 나한테 해주면 그게 그렇게 좋고."
  그게 그렇게 좋고. 우재의 말이 잎을 모두 잃은 겨울나무 같은 내 마음을 미풍처럼 흔들고 지나갔다.

  "해미야,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이 네가 상대를 배려하는 방식이란 걸 알아. 그래서 나는 그걸 존중해 주려고 노력해왔고. 하지만 나는 이제 그걸로는 모자란 것 같아. 나는 네가 조금 더 간섭해주면 좋겠고 어리광을 부려주면 좋겠고, 누굴, 왜 찾고 있는지도 말해주면 좋겠다. 나만 너를 보러 오는 게 아니라 너도 내 안부를 궁금해하며 제주로 만나러 와줬으면 좋겠고."

 

부디 우재를 놓치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이 책을 읽는 내내 가득 들었습니다. 마치 E가 아니라 I형의 사랑을 보는 듯한 잔잔한 그들의 로맨스 이야기가 좀 더 나오길 바랬는데, 아쉽게도 마무리는 상상에 맡겨졌네요. 더불어 G시에서 끈끈했던 한수와의 인연도 너무 빨리 해미가 놓아버린 것 같아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는데요.

 

  "하지만 기억하렴. 그러다 힘들면 꼭 이모한테 말해야 한다. 혼자 짊어지려고 하면 안 돼. 아무리 네가 의젓하고 씩씩한 아이라도 세상에 혼자 감당해야 하는 슬픔 같은 건 없으니까. 알았지?"

 

만약 우재가 아니라 한수와 다시 인연을 만들어나가는 버전도 나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더라구요. 그러면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독일 버전이 되는건데 말이죠. 비록 반전과 엔딩은 조금 아쉽지만 전체적으로 몽글몽글한 감성과 과거의 상처를 딛고 눈부시게 한 발짝 나아가는 해미의 마지막은 참으로 여운 짙게 잘 끝난 듯 합니다. 아니 이제 시작인가요.

 

 

 

백수린 작가의 다음 장편 소설을 기다리며

찬찬히 오독오독 곱씹으며 난생 처음으로 한 편의 소설을 굉장히 깊이 있게 들여다본 듯 합니다. 이렇게 취향에 맞는 소설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러고 보니 서정적인 장르가 취향이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네요. 사실 감성적이거나 서정적이라고 해도 자칫 지루할 요소가 많은데, 백수린 작가는 전혀 지루함 없이 글을 전개하는 실력을 갖춘 것 같습니다.

 

 

  내 삶을 돌아보며 더 이상 후회하지 않아. 나는 내 마음이 이끄는 길을 따랐으니까. 그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자긍심이 있는 한 내가 겪은 무수한 실패와 좌절마저도 온전한 나의 것이니까. 그렇게 사는 한 우리는 누구나 거룩하고 눈부신 별이라는 걸 나는 이제 알고 있으니까.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사람은 희망을 보지. 그리고 희망이 있는 자리엔 뜻밖의 기적들이 일어나기도 하잖니. 그래서 나는 유리병에 담아 대서양에 띄우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네게 보낸다. 나를 위해 너의 편지를 전해준 아이들의 마음이 나를 며칠 더 살 수 있게 했듯이, 다정한 마음이 몇 번이고 우리를 구원할 테니까.

 

비록 단 한 편의 장편밖에 없지만, 얼른 다음 신작도 보고싶은 마음이 크네요. 첫 장편소설이 12년이나 걸려서 과연 두 번째 소설이 얼마나 걸릴지 감도 잡히지 않지만, 분명 이것을 시작으로 좀 더 빨리 새로운 작품을 만나볼 수 있을거라 기대하게 됩니다.

 

기다리면서 아쉬운대로 단편을 좋아하진 않지만, 문체가 너무 취저라 백수린 작가의 단편들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전에 읽었던 소설 <파친코><작은 땅의 야수들>처럼 역사적 배경으로 했던 소설들을 재밌게 봤었는데요. 뭔가 굉장히 극적이였다면 이번 <눈부신 안부>는 은은하게 펼쳐진 역사 위에 그려진 애틋한 사랑이였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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